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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핵개발 의지가 미친 영향

카리스χάρης 2024. 10. 18. 23:58

사건 순으로 간략 요약하였다. 
 
 
 
1972년 9월 초 : 김일성 핵개발 첩보 보고됨. 박정희 대통령 핵개발 검토 지시. [1]
1972년 9월 8일 : 오원철 수석 ‘원자 핵 연료 개발 계획'을 보고함. 소요기간 6~10년 계획.

1973년 7월 고리 1호기에 이어 고리 2호기 건설계획 수립.

1974년 10월 19일 : 프랑스와 원자력협력 협정 체결. 우리 연구진이 핵폭탄 제조기술과 기폭기술 연구함. 1970년대 중반 ‘20킬로톤 이상급. ..미만' 원자폭탄 설계 완성 함.

미국은 NPT 비준 전까지 신용대출 승인하지 않는다고 선언. 

1975년 3월 20일 비준 선언 후 미 수출입은행과 한국전력간 계약 체결됨. 
1975년 4월 12일 프랑스와 ‘핵연료 재처리공장 설계 및 기술용역 도입계약', ‘캐나다와 중수로 원자로 도입 계약 체결. 

핵개발 중지에 대한 미국의 높은 압력 시작됨. 국제 원조 차단 등
1975년 8월 19일. 슈나이더 주한 미국대사는 군사원조를 안하겠다며 강한 압박을 함. 
1975년 8월 27일. 미 국방장관이 서울로 직접와 박대통령에게 압박함. 
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의 핵무기 개발이 한미 동맹을 위태롭게 할거라며 직접적으로 경고했다. 
1975년 11월 13일 압박에도 불구하고 한불양국은 프랑스 외무성에서 한프랑스간의 원자력 협력 사업에 대한 양해각서를 교환하기로 함. 그러나 서명예정 시간 30분전 프랑스로부터 연기 통보받음. 
프랑스로부터 비밀리에 계약 파기를 한국이 먼저 요청 해줄 것을 제의 받음. 
1975년 12월 필립 하비브 미국무부 대사는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고집할 경우 전반적인 한미안보관계가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냄. 

1976년 1월 26일 박정희는 프랑스 정부에 핵연료 재처리시설 도입계약 파기를 통보함. 
1976년 박정희는 극비리에 핵개발을 다시 추진함. 
1976년 12월 1일 핵연료개발공단 출범함. 화학처리 대체사업으로 위장한 핵 재처리 시설 국산화 작업. ‘기기장치 개발사업'위장 명칭으로 연구용 원자로 국산화 개발 시작됨. 
계획상 1981~1982년 사이에 핵무기 보유가 가능했음.
이 대체 사업은
1978년 10월에 핵연료가공시설이 준공되고 1979년 5월에 우라늄 정련등 성공적으로 추진됨

 
박정희는 탄도 미사일 강화하는 노력을 계속 기울였고, 이는 핵탄두 운송수단임. 
미국 CIA 정보망에 다시 포착. 미국 정부는 ADD의 백곰 미사일 개발 사업을 핵 개발의 일부로 판단함. 
 
1976년 11월 대전기계창으로 위장한 유도탄 연구소가 완공되면서 연구 개발 마침. 

1977년 6월 16일 이휘소 박사 미국에서 의문의 자동차 사고로 사망. 박정희에게 핵개발 기밀 문서를 전달했다는 의혹이 있었음. 자동차 사고로 운전자만 사망한 것에 대해 의혹도 있었으나 연구진들은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림. 이휘소 박사는 세계적 물리학자로써 생존했다면 노벨상 수상했을 것임. 그의 연구 영향을 받은 연구자들은 이미 수상했음.
 

 
1978년 9월 26일 한국 국방과학연구소는 프랑스의 기술 지원을 통해 사정거리 180km의 지대지 유도탄 K-1 일명 ‘백곰'을 개발해 하늘로 쏘아 올리는데 성공했다. 
당시 한국을 외신들은 ‘잠재적 핵보유국가'로 분류했다
 
1978년 9월 26일 세계 7번째로 국산장거리 유도탄 등과 다연발로켓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 
 
미국 초긴장

미국의 한국의 핵 무기 개발 포기 종용 및 압박 계속됨. 
당근책으로 핵 공여 제안했다는 설. 부산항에 핵폭탄 도착함. 홍성 실험장에서 터트렸으나 가짜였고, 그래서 재차 보내왔고, 이 핵폭탄으로 78년 10월 7일 홍성 지진이 일어났다고 함. [2, 음모설이라는 의견이 지배적]

 
1978년 11월 7일 한미연합사령관 출범, 미국은 평시와 전시 한국의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게 됨. 
 
1979년 6월 29일 한미정상회담 냉기 좌르르... 말 듣지 않는 박정희가 미국의 눈 밖에 나 있었다는 의혹.
 
1979년 10월 18일 부마민주항쟁 발생.
전두환이 이끄는 3공수대가 진압에 활약하였으며, 미군의 승인 없이 투입 불가능한 부대의 동원 등의 정황으로 미군의 개입 의혹이 있었음.
투입 부대의 인권유린 및 과잉진압으로 국민들 더 분노함. 비난은 최종 결정자였던 박정희 유신정권을 향함.
차지철(강경진압파)과 함께 처참한 현장을 본 김재규(온건대응파)도 이때 충격 받음.

 

전두환이 당시 국군 보안 사령관 [9]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최측근인 김재규에 의해 피살됨. 시기적으로 미묘한 때에 일어난 사건이며, 당시 김재규가 미국 관련자와 만났다는 설, 사형집행 전까지도 미국으로부터 연락 온것이 없는냐 질문했다고 하는 점, 가족과의 면회도 불허 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금지 시킨 상태에서 급히 사형 시킨 점 등 여러 정황들에 의문들이 제기되었으며, 역시나 미국 배후설이 있었음.


1979년 전두환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 장악.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역시 3공수단 투입 됨.
 

1981년 3월 3일 전두환 선거제 바꾸고, 간접선거로 대통령 당선. 마찬가지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세우기까지 미국이 배후에 있었다는 의혹들이 있었음.
 



[1]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189
[2] https://kibaek.tistory.com/1555
[3]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A0%95%ED%9D%AC
[4] 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142149/1/000000151388.pdf
[5] https://www.sportsseoul.com/news/read/341368
[6] https://namu.wiki/w/1978%EB%85%84%20%ED%99%8D%EC%84%B1%20%EC%A7%80%EC%A7%84
[7] https://www.insight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087
[8] http://koreascientists.kr/scientists/merit/merit-list/?boardId=bbs_0000000000000028&mode=view&cntId=21
[9] https://www.youtube.com/watch?v=eOezYDm7BUI
[10]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9C%98%EC%86%8C

이휘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벤저민 휘소 리(영어: Benjamin Whisoh Lee, 1935년 1월 1일~1977년 6월 16일) 또는 한국명 이휘소(李輝昭)는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 이론물리학자이

ko.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