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진심과
차가운 결기와
따뜻한 희생을 각오한
눈빛들
살아있는 기개
1922년 모스크바 극동 민족 대회에 참여하신 독립운동가분들
홍범도, 김원경, 여운형, 권애라, 최진동, 이동휘, 김규식, 김립, 한형권, 조봉암등.
그들은 왜 극동 민족 결기 대회에 참여 하였나?
>>>> 극동 민족 결기 대회에 대하여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민족 결기대회(정식 명칭: 제1차 극동민족대회, First Congress of the Toilers of the Far East).이 대회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렸고, 당대의 제국주의, 식민지 해방, 공산주의 운동과 밀접히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다.
1920년대 초는 일본, 미국, 영국 등 서방 열강이 극동과 동아시아를 둘러싸고 경쟁하던 시기였고, 중국, 한국, 인도 등 아시아 각국의 민족해방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다.
코민테른(Comintern, 국제공산주의운동기구)은 아시아 피압박 민족들과 손잡고 제국주의 타도를 목표로 이 대회를 기획한다.
참가국들은 한국, 중국, 일본, 몽골, 시베리아, 만주, 티베트, 부랴트, 인도, 페르시아 등 극동 및 중앙아시아 전역과 관련한다.
공식적 140명 (비공식적 180명까지)의 인원이 참가하였다.
이 대회의 목적은 제국주의의 타도, 민족해방운동 지원, 공산주의 확산에 있었다.
구체적으로 일본, 영국, 미국 등 열강의 식민 지배를 반대하는 것이었으며, 피억압 민족들의 자주적인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또한, 코민테른 지도하에 혁명 네트워크 를 구축하여 공산주의를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극동 공동전선은 러시아 혁명 성과를 아시아에 확산시키고, 특히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전략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이 대회는 극동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의 첫 국제 연대 시도였으며, 특히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소련을 통한 국제혁명 네트워크 접근 기회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코민테른 의존 문제와 노선 분열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후 1922년 코민테른 극동국 설치는, 1920~30년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으로 이어지게 한다.
이 회의는 아시아 혁명 세력 최초의 국제적 연대로써 한국 독립운동 국제화의 전환점을 만든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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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배경에 왜 공산주의 운동이 포함되었을까?
이를 위해서는 공산주의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 봐야 한다.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근대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기존 왕권 중심 체제가 가지고 있던 불평등을 오히려 강화하며 많은 모순을 드러냈다.
농민과 장인들은 몰락하고, 빈민층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편입된다.
그들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 노동권 부재에 시달렸으며, 심지어 10살이 안된 어린아이들도 굴뚝청소등 위험한 노동에 동원된다.
사람들은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문제의식 1: 생산력은 급격히 발전하였는데,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데, 왜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난을 넘어 빈곤한가?
사람들은 생산수단의 소유 구조와 자본주의의 착취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사실, 왕권 체제일때도 사람들은 일하는 자들은 가난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일한자들의 결실을 차지하는 것에 사람들은 나름의 불만을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정당화할 이념이 없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믿으며 받아들여야 했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으로 절대 왕권에 대한 도전과 시민의 각성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았다.
법적으로 시민이 평등하더라도, 경제적 자본을 가진 소수만 실질적 자유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른 문제의식이 부상한다.
문제의식 2: 정치적 평등만으로는 경제적 불평등을 극복할 수 없다. 실질적 평등을 위한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
맑스의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탄생하면서, 이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불만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맑스는 <경제학 철학 초고(1984)>에서, 자본주의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소외시킨다고 분석했다. 책은 다음의 내용을 다룬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결과물을 소유하지 못하고, 자본가를 위해 노동을 팔아야 했다.
인간은 스스로를 실현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본 축정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노동은 인간 해방의 핵심이며, 노동의 주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경제 사회 노동의 문제를 탐구했던 그는 이 문제를 공유하고 사회적 움직임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
공산당선언<1848>을 통해, 노동자층 단결을 외치며 공산주의가 탄생하게 된다.
그들의 핵심 주장은 1) 역사는 생산수단을 둘러싼 계급투쟁의 과정이다.(역사유물론), 2) 자본은 노동을 착취하여 이윤을 만든다(자본주의 비판), 3)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체제를 폐지해야 한다(계급해방), 4) 생산수단을 공동 소유하고, 계급과 착취를 없애는 사회로 이행해야 한다(공산주의 사회).
1)과 2)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이 인간의 탐욕과 욕망을 완전 배제하면서 문제의 씨앗이 생기기 된다.
계급해방과 공동 소유를 사회의 이상적인 질서로 규정함으로써 이것을 이루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들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게 된다.
결국 그들의 이상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필요악의 명목으로 폭력이 동원되게 되고, 여기에 미묘하게 개인의 욕망이 개입된다.
처음 시작이 어땠는지 모르나 결론적으로 여러 국가들에서 공산주의는 1인 독재로 귀결되었다. (중국, 소련, 북한, 캄보디아, 루마니아 등등).
결론적으로 초기 공산주의는
산업혁명으로 파생된 자본주의의 불평등, 제국주의가 가져온 억압 등을 극복하기 위한
시민을 위한 국가 건설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애민 정치의 이상향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느 누구도 실제 공산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경험한 적이 없기에,
각자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공산주의라는 단어에 대입시켜 논의하기도 했다.
억압과 불평등으로부터의 시민들을 해방 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는 좋은 이념적 도구였다.
그렇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를 공부하며 따랐다.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 전대통령도 반공의 상징적 인물이긴 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공산주의 사상과 운동에 직접 관여하였다. 남조선노동당 군사조직에 가담한 바 있으며, 이것을 계기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공산당의 경제 실패를 목격하며, 철저한 반공의 노선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의 집권 모델은 북한식 체제와 자유민주주의를 혼합한 형태로써 그는 북한식 체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혼합모델을 연구하며 적용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어쨌든,
당시 공산주의가 퍼지던 초기에는 많은 깨어있는 젊은이들이 새로운 이념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지금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사람들도 국가 시스템을 고민했던 사람들은 초기 형성과정이었던 공산주의에 희망을 걸기도 했었다.
즉,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당신 세계에 퍼져 있던 세상을 변화시켜 시민들을 잘 살게 하자던 야심찬 꿈도 녹아 있던 결과 였다.
>>> 그 회의에 일본은 왜 참여 했을까?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1922)에 일본 대표단이 포함되었다는 건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 대회는 명목상 “제국주의 타도, 피압박 민족 해방”을 위한 자리였는데, 당시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국제공산주의운동(코민테른)의 전략과 일본 내부 사정이 맞물려 있었다.
코민테른(Comintern, 제3인터내셔널)은 세계혁명을 목표로 했고, 특히 극동과 아시아 혁명을 위해서는 일본을 빼놓을 수 없었다.
1920년대 초 동아시아 정세를 보면, 일본은 이미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한 상태이다. (조선(한국) 식민지 지배, 중국 동북부(만주) 경제·군사 영향력 확대, 러시아 연해주 진출).
그러나, 코민테른은 일본 내부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즉, 일본 국가 자체는 제국주의 세력이지만, 일본 내부의 노동자·사회주의자 세력은 잠재적 혁명 동맹군이라는 관점이 있었기에, 이 회의에 일본인들이 참여했던 것이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이 부분은 중요했다. 왜냐하면, 일본 내부의 사회주의자 세력과 연결되는 것이 조선 독립운동을 국제적으로 확산하는 전략적 통로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봉암, 이동휘, 김단야 같은 인물은 코민테른 활동을 통해 일본 내 반제국주의 세력과도 접촉하기도 했다.
결론,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해쓴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단순히 공산주의 프레임을 씌워서 비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이 현상은 당시 세계사적 흐름과 연결지어 생각해야 하며,
실제로 현대사의 많은 반공주의자들도 그들이 깨어있는 젊은이였을 때 공산주의를 흠모했던 역사가 있다.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기존의 시스템에서 억압받던 시만들을 구제해줄 도구로 보였다.
나중에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기까지 그들이 공산주의를 믿었던 이유는 아직 시행된 적이 없던 공산주의가 이상적으로는 애민의 이념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 희생하신 분들의 뜻을 기리는 것이 우리의 작은 도리이다.
그들의 살아 있는 눈빛을 보며 그들의 따뜻한 진심을 느껴보자.
https://youtube.com/shorts/yM0RY3A6Scs?si=6fuiKJ9-H2W35m5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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