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은 실재하는 외부 세계에 대한 인간 유기체의 지적 적응 과정[1]" |
제임스 K. 파이블먼(James K. Feibleman)의 저서 『Adaptive Knowing: Epistemology from a Realistic Standpoint』는 전통적인 인식론의 주관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현실주의(Realism)'에 기반한 새로운 지식의 틀을 제시하는 학술적 저작이다.
당시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주관주의적 경향을 가졌던 인식론은 데카르트, 흄, 칸트였다. 파이블먼은 이들이 '객관적 실재'와 '인식'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의 경우 '생각하는 나'에서 출발함으로써 철학을 자기 폐쇄적인 의식 속에 가두면서 이원론적 함정에 빠졌으며, 흄(회의적 주관주의)의 경우 인과성과 보편적 법칙을 인간의 심리적 '습관'으로 환원시켜 객관적 실재를 부정했다. 칸트(초월적 주관주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없고 인간의 사고 형식(범주)에 의해 구조로 '구성'한다고 보았기에, 칸트역시 파이블먼에게는 명목론의 변종이었다. 이들은 객관적 세계를 주관의 포로로 보는 관점들이었다.
이들 외에도 파이블먼은 당대 유행하던 주관주의적 사조들을 비판하였다. 조지 버클리의 경우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유심론을 '실재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부정'으로 보아 강력히 비판했으며, 베나데토 크로체라는 이탈리아의 관념론자도 역사를 정신의 전개로만 보았다며 비판했다. 왜냐하면 파이블먼에게 문화나 예술도 정신의 산물 이전에 객관적 구조를 가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존듀이도 마찬가지이다. 파이블먼은 찰스 샌더스 퍼스의 실재론적 실용주의는 찬양했지만 듀이의 도구주의, 실용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는 듀이가 지식을 문제 해결의 도구로 다루는 관점이 지식 자체의 영원하고 객관적인 성격을 간과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도 마찬가지다.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고 언어 분석에만 매달리고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세계의 실제 층위(그가 있다고 믿었던 층위이다. Ontological Levels)를 탐구하는 철학의 본질을 훼손한다고 보았다.
구성주의(Constructivism)나 직관주의(Intuitionism)이나 형식주의(Formalism)도 그의 거부 대상이었다. 브라우어(L. E. J. Brouwer)는 수학을 인간 정신의 산물로 본 인물이다. 파이블먼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며, 그에게 수학은 인간이 있든 없든 존재하는 '논리적 실재'이다.
즉, 그는 '인간의 마음이 실재를 결정한다.'는 이러한 태도를 굉장히 경계했으며, 자신만의 실재론을 다시 세움으로써 주관주의자들이 만든 인식론의 감옥(Epistemological prison; 혹은 인식론적 고립Isolation이라는 표현도 그는 사용했다.)에서 철학을 구출해 다시 '존재론Ontology'로 돌려보내고자 했다.
| 인간이 인식하기 때문에 대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실재하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The objects of knowledge do not depend for their existence upon being known; on the contrary, knowledge depends upon the existence of its objects[4]. Realism is the doctrine that the world of objects is real and exists independently of being perceived or known by any mind[4]. |
>> '적응적 앎'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현실주의적 인식론 (Realistic Epistemology): 객관적 실재론
파이블먼은 지식을 단순히 인간 마음의 산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식의 대상(현실 세계)은 인식 주체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앎의 객관성을 강조하고 반주관주의를 표방한다. 앎이란 외부 세계의 구조를 인간의 정신이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대상과 유기적으로 관계 맺는 과정이며, 지식을 주관적 경험이나 감각 데이터로만 환원하려는 시도를 경계하며, 대상의 본질적인 속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2. '적응적' 앎 (Adaptive Knowing)
파이블먼은 앎에 대해 적응적이라고 보았는데, 이것은 지식이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생존과 진화의 도구임을 시사한다.
인간이 환경에 더 잘 적응하기 위해 외부 세계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이 곧 지식의 형성 과정이다. 앎은 유기체가 환경과 주고받는 피드백의 결과물이며, 이 과정에서 지식은 점진적으로 수정되고 정교해진다.
3. 과학적 방법론의 중시
대상의 본질적인 속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는 형이상학적 추측보다는 과학적 탐구 방법을 인식론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지식은 가설을 세우고 이를 현실 세계에서 검증하며 수정해 나가는 '자기 수정적(Self-correcting)' 특성을 갖는다. 과학적 발견이 누적됨에 따라 우리의 지식은 객관적 실재에 더욱 가까워진다 (낙관적 현실주의).
4. 인지 구조와 존재론의 결합
파이블먼은 인식론(어떻게 아는가)을 존재론(무엇이 존재하는가)과 분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인지 구조는 세계의 층위(물리적, 생물학적, 문화적 층위)를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각 층위에 맞는 적응적 지식이 필요하다.
이 저서는 인식론을 심리학, 생물학, 물리학과 통합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어, 분석철학적 관점보다는 거시적인 시스템 철학(Systematic Philosophy)의 성격이 강하다.
>> 콘라트 로렌츠의 저서 '거울의 뒷면'과 비교
로렌츠 역시 진화론적 인식론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파이블먼과 유사점을 갖는다.
두 학자 모두 지식은 단순히 추상적인 논리적 산물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것은 유기체가 생존하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다. 적응이라는 단어를 통해, 인식 주체 밖에 독립된 실재가 존재한다는 점을 전제할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의 인지 장치(감각 기관, 뇌)는 외부 세계의 정보를 최대한 정확하게 받아들여 생존 가능성을 높이도록 진화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요 차이점이 존재한다. 파이블먼은 지식이 어떻게 현실의 구조를 반영하고 시스템적으로 통합되는가에 집중했다면, 로렌츠는 인지 능력을 '선천적 해방 기제'나 '각인'같은 생물학적 기능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때문에 인식 장치에 대해서도 파이블먼은 현실 세계의 객관적 구조가 지식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었으며, 로렌츠는 우리 뇌의 인지 구조가 진화의 역사 속에서 '선천적 가설'로서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비유적으로 보면, 파이블먼에게 지식은 외부 실재를 체계적으로 표상하는 거울이며, 로렌츠에게는 거울(인식)에 비친 상 뿐 아니라, 그 거울을 구성하는 기계적 장치(은박 상태 등, 뇌와 신경계)가 인식에 영향을 미치며 이것을 우리는 탐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간단한 비교를 통해 로렌츠가 더 생리학적이고 인류학적인 접근을 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렌츠에게 칸트의 '아프리오리 A priori' 선험성은 생물학적으로 보면, 우리 조상들의 생존의 결과로 정해진 적응적 틀이다.
파이블먼이 우리의 인식과 현실을 Mapping하는 차원에 관심을 둔다면, 로렌츠는 외부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인간의 생물학적 렌즈의 형성 과정과 그 물리적 구조를 파헤쳤다.
>> 구조주의와(Structuralism)의 비교
어떻게 보면 파이블먼의 관점은 구조주의 Structuralism과 도 비슷해 보일 수 있다. 모두 개별적인 현상보다는 그 이면의 구조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의 핵심은 어떤 사물의 의미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체계(System)속 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에 있다. 한편, 파이블먼은 실재하는 세계가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지식은 그 구조를 체계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보고 있으며, 로렌츠는 인간의 인식 장치가 생물학적으로 고정된 구조(거울의뒷면)을 가지고 세상을 필터링한다고 본다. 모두 지식을 파편화된 정보의 나열이 아닌 구조적 정합성을 갖춘 체계로서 이해한다.
그러나 정통 구조주의와 이들의 관점에는 결정적 차이가 존재한다. 바로 구조의 위치이다.
일반적 구조주의에서 구조는 인간의 보편적 정신 구조나 언어 체계에 내재한다. 그러나 파이블먼이나 로렌츠의 경우는 외부의 물리적 실재와 이를 감당하기 위한 생물학적 적응에서 기원한다. 현실과의 관계 차원에서 비교한다면 구조주의에서는 구조가 현실을 구성하며, 따라서 우리는 구조라는 안경으로만 세상을 본다. 한편, 파이블먼이나 로렌츠의 경우 현실(실재)이 구조를 강제한다. 즉, 세상이 그렇게 생겼기에 우리의 지식도 그렇게 진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조주의가 다분히 정적이고 보편적 틀을 강조한다면, 파이블먼과 로렌츠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역동적이고 적응적인 틀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파이블먼의 현실주의는 '객관적 구조주의'로 부를만하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구조를 발견하고 그것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 그의 지향에 맞닿은 인물 : 퍼스, 화이트헤드
파이블먼이 객관적 실재론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는 퍼스와 화이트헤드에 동의한다.
이들은 수학이나 지식이 원래 존재하는 것이며 발견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진리의 근거가 인간의 인식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의 논리 구조 속에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1] Feibleman, J. K. (2012). Adaptive knowing: Epistemology from a realistic standpoint.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2] Feibleman, J. K. (1955). An ontological philosophy of education. Teachers College Record, 56(9), 342-369.
[3] Feibleman, J. K. (1949). A defense of ontology. The Journal of Philosophy, 46(2), 41-51.
[4] Feibleman, J. K. (1951). Culture as applied ontology. The Philosophical Quarterly (1950-), 1(5), 416-422.
[5] Feibleman, J. K. (1962). An Ontology of Knowledge. In Foundations of Empiricism (pp. 370-382). Dordrecht: Springer Netherlands.
[6] Feibleman, J. K. (1949). An ontology of art. The Personalist, 30(2), 129-141.
[7] Cormier, R., Dubose, S., Feibleman, J. K., Glenn, J. D., Lee, H. N., Pauson, M. L., ... & Sallis, J. (2012). Aesthetics I.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8] Feibleman, J. K. (1946). An introduction to Peirce's philosophy.
[9] Feibleman, J. K. (1956). The institutions of society. -> 인간이 만든 문화나 도구 조차도 일단 존재하게 되면 인간의 인식과 무관한 객관적 실재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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