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6일 비공휴일, 법정기념일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이란 1979년 10월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정희 정권의 유신 독재에 반대한 시위 사건.
대학생들이 촉발시켰지만 시민운동으로 평가받는다.
<배경 및 진행 과정>
1971년 박정희가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상대로 힘겹게 승리함. 이로써 세번째 대통령 임기 가 시작됨. (박정희 53.19%. 김대중 45.25%)
당시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의 세번째 중임이 불가했음. 그러나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의석수가 전체의 2/3를 넘겼기 때문에, 개헌 후 출마하였고, 결국 당선됨.
1972년 10월 27일 유신헌법이 공고되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암흑기가 시작됨.
유신헌법의 내용은 대통령에게 초헌법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음.
표 차이 때문에 유신헌법이 공표됐다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국제적 정세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당시 국제 정세를 보면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5년 안에 주한미군 철수를 통보하고, 실제로 주한 미 7사단을 1971년 초에 일방적으로 철수시켰다. 더구나 1972년엔 닉슨이 갑자기 중국을 방문하여 우호적으로 노선 변경을 하였다. 이에 당황한 한국 정부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북한으로 보내 서로 오판하지 말자며 협약한 게 7.4 남북 공동 성명이었다.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에서도 미군을 철수시켜 공산화를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으며 당시 남베트남과 쌍둥이 국가라고 해도 무방하게 비춰지던 한국 입장에서는 상당한 위기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북한의 군사력은 남한의 2배에 달했기에 유신의 원인 중 하나는 닉슨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통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미국보다 북한에 개헌 소식을 먼저 전했으므로 7.4 남북 공동 성명의 배경은 될 순 있어도 10월 유신의 배경이 될 순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박정희가 갖고 있었던 오직 나만이 국제환경을 헤쳐나갈 유일한 지도자라는 확신과 자신감에 비추어 볼 때 대외적 여건 또한 유신을 추진한 배경의 하나로 볼 수 있다[11]. |
1979년 8월 11일 YH 무역농성사건에 대한 무자비한 정부 진압이 있었고, 이때 김영삼 총재등 신민당 국회의원등이 경찰에 의해 해산되거나 연행함.
무자비한 정부의 대응을 규탄하며 신민당은 농성에 들어갔고, 1979년 범 국민적 항쟁에 나섬.
9월 15일 미국의 뉴욕타임지에 미국 국무부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는 김영삼의 인터뷰가 실림. 어쨌든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은 10월 4일 김영삼의 인터뷰를 반국가적 행위로 규정하고 국회의원 제명시킴. 신민당 국회의원 66명은 자진사퇴로 이에 항의함.
YH무역농성사건과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은 부산을 자극함.
10월 15일 부산대학교에 학원 자유, 언론 자유, 유신독제 종식등의 내용을 담은 민주선언문과 민주투쟁선언문 대자보가 붙음.
10월 16일부터 본격적 시위가 시작됨.
500명의 학생 가두행진 벌임. 경찰과 충돌. 동아대학교도 시위에 합류 함.
5000명 시위 참여함.
17일에도 시위가 진행. 대학생뿐 아니라 자영업, 사무직, 제조업, 일용직 노동자등이 모두 참여함.
10월 18일 마산으로 확대됨.
경남대학교 학생 1500여명이 민주주의 회복, 독재 타도를 내세우며 시위함.
인근 노동자들 및 시민도 참여.
8000여명의 인원.
구호 중 에는 '부가세 철폐'가 포함 됨. 이것이 대학생들의 민주항쟁이었음과 동시에 시민 항쟁의 성격을 띈 것으로 평가되는 부분임.
부마 항쟁은 현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최초의 사건으로 평가됨[12].
- 정부 대응 -
10월 18일 비상계엄 선포함.
대학 휴교령, 야간 통행금지.
부산에서 1058명이 연행됨. 66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됨.
군대 투입됨.
10월 20일 마산에도 군사출동하여 500여명 연행, 59명 군사재판 회부 됨.
10월 24일에는 특별수사부를 설치하여 깡패 소탕을 명분으로 132명 연행, 23명 구속.
시위 중 끌려간 사람들은 통닭구이, 물고문, 성고문 등을 당하였고, 고문을 통한 허위 자백이 있었으며, 고문 피해자들이 자살하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생을 마감하기도 하였음.
- 의의 -
비록 정부의 대응으로 단기간에 진압되었지만, 유신체제를 아래로부터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됨.
부마항쟁이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등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이념을 계승한 민주항쟁의 하나로 평가받음.
2019년 9월 17일에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됨.
한편, 김재규와 차지철은 부마민주항쟁의 대응방향을 두고 갈등을 빚었는데, 김재규는 온건한 대응을 차지철은 강경대응을 주장했으며, 차지철의 의견이 관철 됨.
전두환이 진압 작전 계획을 검토하고 지휘 함[8].
10월 26일 박정희 사망. 측근이자 실세였던 김재규의 총에 맞음. 국무총리 최규하를 중심으로 한 과도내각 출범.
김재규는 80년 5월 24일 교수형에 처해짐[13].
최갑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장은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가 자초한 것이었다. 만약 박정희가 10월26일 김재규의 손에 죽지 않았다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을 것이고, 시민들이 직접 유신독재를 끝장내고 민주정부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9]
포털들의 기념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논란
1978년 출범한 한미연합사가 평시 작전 통제권을 행사 할수 있었다. 시위 진압에 해병대를 포함한 군부가 투입되었다는 것은 미국의 승인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시민들에게 미국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의지가 없음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한편, 미국은 시위의 확산이 북한에게 약점으로 작용할까 우려하여 군사작전을 어쩔수 없이 승인했다는 입장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한국의 군부를 지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입장이다.
이때 부마에 투입된 3공수여단은 나중에 광주 5.18 민주항쟁에도 투입된다.
[1]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03773&cid=40942&categoryId=31778
[2] https://namu.wiki/w/%EC%A0%9C7%EB%8C%80%20%EB%8C%80%ED%86%B5%EB%A0%B9%20%EC%84%A0%EA%B1%B0
[3] https://www.blueroofpolitics.com/post/conservatives-shun-the-bu-ma-uprising-memorial/
[4] https://en.namu.wiki/w/%EB%B6%80%EB%A7%88%EB%AF%BC%EC%A3%BC%ED%95%AD%EC%9F%81 [이미지들]
[5] https://archives.kdemo.or.kr/display/en/1970.html [이미지들]
[6] https://www.youtube.com/watch?v=NIAljPbxlOg [이미지들]
[7] https://imnews.imbc.com/news/2022/society/article/6420681_35673.html [김재규와 박정희 관계, 고문 후유증 및 희생자들]
[8]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3/0009324926
[9] https://m.news.zum.com/articles/55598150
[10] https://www.youtube.com/watch?v=cfJm6RUcBXo
[11] https://namu.wiki/w/10%EC%9B%94%20%EC%9C%A0%EC%8B%A0
[12] https://youtu.be/cfJm6RUcBXo?si=flxlh5LzkafaKoEc [부마민주항쟁과 경제파탄 부가세 철폐]
[13] https://m.ppomppu.co.kr/new/bbs_view.php?id=humor&no=329044
[14] https://v.daum.net/v/cOuGHy5tjJ [김재규 나들이 코스]
[15] https://www.ytn.co.kr/_ln/0103_202005261444062997 [김재규 최종진술]
[16] https://www.youtube.com/watch?v=eOezYDm7BUI [3공수 특전여단]
'일상잡담 > 자유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밑빠진 독 같아. Do aid really need to be done? (1) | 2024.10.24 |
---|---|
국가 문화재를 사적 소유물 다루듯 - 예술인의 아픔 (0) | 2024.10.23 |
국회의원 명절 떡값 (1) | 2024.10.01 |
UN 지원과 정직한 예산 사용이 가져온 산림녹화 (0) | 2024.09.26 |
유연함인지 타협인지 잘 구분해 (0) | 2024.08.13 |